since.2000.09.07

언뜻 기억나는 SF 장르의 한국 작품이 없는 걸 보니 근래에는 이게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캘리포니아 사는 사만다와 톰(…)이 등장하는 SF는 나와는 멀리 떨어진 세계의 이야기 같지만 지역명도 이름들도 내 현실과 맞닿은, ‘딸 많은 집의 남희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나오는’ SF는 갑자기 나와 너무나 밀착된 느낌이라 재미있었다. 그래서 테드 창의 책을 읽다보면 보통 이야기의 설정에 집중하는데 여기 단편들은 읽으면서 설정이나 배경에 대해 이해하는 노력이 줄어드니 좀더 집중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따라가게 되나보다.

다 읽고 나서 마음에 들었던 건 표제작인 ‘옆집의 영희 씨'(토토로도 아닌데 나는 왜 자꾸 ‘이웃집 영희 씨’라고 기억하는가…)와 ‘처음이 아니기를’.

옆집의 영희 씨는 주인공이 옆집에 외계인이 살기 때문에 싼 값으로 나온 도심의 오피스텔을 구하면서 시작되는데 그러다 우연히 옆집의 외계인과 마주치고 조금씩 왕래를 하게 되고 어느날 그 인연은 없었던 듯 끊어지는 이야기.
읽을 때는 다른 작품보다 특별히 재미있었던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다 읽고 나니 자꾸 생각이 난다. 아마도 주인공 수정과 옆집 영희 씨의 작별이 막 눈물샘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건조할 정도인데 그렇다고 이런 이별이 나쁜가 하면 오히려 이쪽이 더 담담하게 리얼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후자는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읽는 내내 나에게 그 ‘처음’이 된 사람이 생각나서 마음이 저렸다.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처음’이 무엇인지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지 않을까.
좀더 어리고 아직 가까운 주변인의 죽음을 별로 겪어보지 않았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흐려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갑작스럽게 가까운 사람들을 하나 둘 잃고 나니 누구의 죽음이든 ‘잊혀지는’ 일도, ‘흐려지는’ 일도 절대 없더라.
시간이 흐르면 상실의 슬픔은 마음의 바닥에 서서히 가라앉지만 그러다 일상에서 그 죽음을 상기할만한 무언가를 만나면 순식간에 출렁~ 하며 그 슬픔이 마치 모래알처럼 점점이 퍼지고 어제 겪은 일인 양 다시 온 마음을 헤집는다.
그래서 읽는 내내 누군가에게 내가 ‘처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1부의 이야기들을 읽다가 언뜻 생각난 건 예전 한참 윙크와 나인이 흥하던 시절에 활동하던 만화가 한혜연의 작품들? 등장 인물 대부분이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지만 그렇다고 밋밋하지 않고 공감가는 접점이 많아서 그랬던 듯하고 2부 이야기들은 왠지 강경옥이나 유시진이 만화로 만들면 어울릴 것 같다.

정돈된 문장들도 채워진, 한 편 한 편 공들인 게 느껴지는 단편집.
이런 책은 다 읽고 나면 뭐라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다음으로는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보다가 충동구매한 ‘체체파리의 비법’과 수인님의 추천한 ‘저 이승의 선지자’가 대기 중. 올해는 내내 집에만 있어서 책은 더 볼 수 있었을텐데 이상하게 책에 손이 가질 않아 평소의 절반도 못 읽고 있는 것 같다.

1부 옆집의 영희 씨
디저트
우주류
앨리스와의 티타임
입적
마산앞바다
귀가
옆집의 영희 씨
처음이 아니기를
비거스렁이
개화
도약

2부 카두케우스 이야기
이사
재회
한 번의 비행
가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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