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이 영화는 작년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자마자 봤는데, 인물들의 감정선이 좀 겅중겅중 건너뛰고 주인공 리브의 사연에 대해서도 너무 설명이 없어서 추측만으로 지나가야할 상황이 많아서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딱히 글로 남길만한 게 없어 리스트에 별점만 적고 지나갔는데 그 뒤에 타임라인에 간간히 올라오는 영화 감상 후기들은 평이 너무 좋길래 혹시 내가 뭔가 놓친 게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원작이 있다는 글을 보고 결국 도서관에서 대여 완료.

지난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볼 때도 그랬지만 원작이 있는 미디어를 볼 때는 미디어→ 원작 순서로 가는 게 감상에 도움이 된다. 이번에도 역시 영화에서는 생략된 설명들, 감정선들을 소설을 읽으며 채우고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과 배경은 영화 속 화면들로 상상을 메꿔나갔다.

1850년 아일랜드의 어느 마을, 한 소녀가 4개월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도 생존하여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적의 상징으로 추앙받기 시작한다. 금식 소녀 애나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면서 두 눈으로 직접 기적을 보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한편, 나이팅게일의 제자이자 노련한 영국 간호사 리브는 2주 동안 어느 환자를 돌보며 건강 상태를 관찰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아일랜드로 향했는데 도착하고 나서야 애나가 진짜 살아 있는 기적인지, 영악한 사기꾼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고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로 인해 마음의 거리를 두고 냉정한 시선을 보내던 리브는 점차 애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위선과 추악한 진실에 대해 알게 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종교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광기와 구분하기 어렵다.

우선 영화에 대해.

강단있지만 많은 사연을 가진 리브 캐릭터가 작지만 탄탄한 체구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의 플로렌스 퓨와 정말 잘 어울려서 마치 처음부터 이 배우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영화를 볼 때는 아무래도 애나가 정말로 ‘아무것도 먹고 있지 않은지’에 초점을 맞추며 보게 됐는데 그 후에 밝혀지는 사실들에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고 영화의 엔딩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내용은 너무 어둡고 그로테스크했지만 마지막이 그 모든 걸 단숨에 씻을 만큼 깔끔해서 딱히 남길 말이 없었다. 그래서 영화는 별 세 개 반 정도?

원작 소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리브가 나이팅게일의 제자라든지, 1800년대 아일랜드 대기근과 그 시절에 유행했다는 사후사진(죽은 사람을 산 사람처럼 꾸며 산 사람과 함께 사진으로 남기는 것. 근데 저 당시에 사진 찍는 비용이 적지 않았을텐데 애나의 가족은 그럴 돈이 있었을까 는 좀 의문이었다)까지 언급할만큼 시대상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던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사이의 반목과 갈등도 이해하기 쉬웠고 주인공 리브가 점점 애나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 영화보다 훨씬 매끄럽다.(영화의 주어진 시간보다 소설의 종이가 더 넓으니)

특히 초반에 리브가 ‘초장에 이 사기극을 발가벗겨 버리겠어’라고 의욕에 넘쳐 있는 모습이나 상대방이 갑갑한 소리 할 때마다 하는 생각들이 영화의 리브 보다 생기있어서 나는 소설의 리브 쪽이 좀더 호감이 갔다. ^^;

리브와 번의 러브 라인은, 영화판에서는 둘의 정사 장면이 ‘난데없다’는 게 단점 중 하나였는데 소설판에서는 그보다 섬세하고 납득할만 하게 그려진다.

내용은 영화보다 소설이 훨씬 참담하고 갑갑하다.
영화에서는 애나의 금식이 주변에게 권유받은 희생 정도로만 그려졌다면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손 쓸 도리 없이 금식 밖에 선택지가 없을 정도로 구석에 몰린 처참함이었고 리브가 한 인간으로서 선택해야만 하는 길에 대한 고민은 더 깊었다.

애나를 둘러싼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환장스러움(…)에 감탄하다보니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가서 요근래 책 한 권을 한번에 다 읽은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어제는 정말 끝까지 정신없이 잡고 읽었다.

소설을 읽고 나니 오히려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고, 영화도 이 소설로 만들 수 있는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디테일이 많아서 그걸 적절하게 정리해서 화면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았겠더라.

딸내미가 책 뒤에 줄거리를 보더니 궁금해해서 결국 책도 주문.

+사실 처음에 줄거리를 보고 생각난 건 유튜브에서 봤던 이 이야기…
가십을 만들고 그걸로 돈 버는 역사가 꽤 길구만. 😑

4 responses

  1. 디멘티토

    저도 영화를 인상깊게 봐서 원작 소설까지 봤는데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광기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때 천주교에 귀의할 생각을 한 적도 있어서 그런지 종교 관련 서적과 영화는 상할 정도로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런 관심의 산물일지 몰라도 이 영화와 연이 닿았다는게 기뻤습니다.

    1. Ritz

      종교란 잘 믿으면 마음을 기댈 곳이지만 잘못 믿으면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쓰기도 쉬운 참 오묘한 것이죠. 요즘 유행하는 더 글로리의 대사처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나는 회개하고 용서 받았어’ 하는 것 같은? ^^;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도 ‘종교’가 허락했다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광기는 사실 천주교가 아니라 어느 종교든 다 있지 않았을까 싶긴 해요.

      저도 영화 덕분에 원작까지 읽고 나니 종교에 대해서도 여성에 대해서도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이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오늘은 영화를 다시 돌려보고 있는데 처음 볼 때와는 또 감상이 좀 다르네요. : )

  2. Amethyst

    라스 폰 트리에의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떠오르네요. “금식” 을 소재로 했다니 섭식장애 있는 여자애들이 좋아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종교 과몰입이 광기가 되는 좋은 영화입니다

    1. Ritz

      잘못된 방법일지라도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대가가 필요해 매달리게 되면 그야말로 광기더라고요. 말씀해주신 영화도 내용을 찾아보니 그로테스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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