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어제 본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기회의 신 <카이로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때)과 기회의 신으로 앞머리는 무성하고 뒤쪽은 대머리, 양쪽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려 있고, 손에는 저울과 칼이 들려 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시인 포세이디포스의 풍자시에

“너는 누구인가?
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간이다
(… )
머리카락은 왜 얼굴 앞에 걸쳐 놓았지?
나를 만나는 사람이 쉽게 붙잡게 하려고.
그런데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지.”

라는 문구가 있다는데, 즉 기회는 바람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한 번 놓치면 붙잡을 수 없다는 의미라고.(그렇다고 신의 외모를 저렇게 설정해놓다니 잔인한 인간들…😨)

이 책을 읽다보니 문득 저 카이로스 신이 생각났다.
저 <기회>라는 앞머리를 잡기 위해서는 ‘타이밍’을 노릴 게 아니라 ‘끊임없이’ 손을 휘두르며 언젠가 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리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그리고 대개 기회를 잡은 사람들이 그렇듯 이 책은 끊임없이 휘두른 손가락이 때로는 저 머리칼에 닿기도 하고 매끈한 뒷머리에 미끄러지기도 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 아이와 같은 유전 정보의 아이를 찾아서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 할머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조곤조곤 말을 쏟아냈다. “너는 유전적으로 정상인 아이를 하나 보면 그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착하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될지 악인이 되어 교도소에서 삶을 마무리할지 알 수 있겠니? 장애가 있는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마찬가지야.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

학습에서 인지능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문화 적합도라는 점이었다. 탄자니아에서 진행된 문해 연구 중 하나는 “탄자니아 아이들 중 50퍼센트가 사자 사진을 보고 사자라는 것을 맞히지 못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진이 없고, TV도 없으며, 주변에 사자가 살지 않으면, ‘사자’라는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도리가 없다. 누렇고 털이 북실북실한 큰 동물의 사진 아래에 ‘기린’, ‘사자‘, ‘개’라고 쓰인 3지선다 문제를 맞히지 못하는 것은 꼭 글자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에서 중요한 개념은 ‘딱 너의 진도에 맞는 난이도’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좀 더 쉬운 부분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특히 남들과 속도가 다른 아이들은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느끼고 자신 있게 반복할 수 있는 부분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여기가 우리의 주인공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충분히 그곳에 머물며 자신감이 차오른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는 날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다. 그런 자신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이 에듀테크가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녀는 종종 집에 와서 “세상은 지금 이렇게 돌아가고 있어” 라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나에게는 마치 먼 바다를 나갔다 돌아온 전령 같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흐름을 알려주는 소중한 존재였지만 그러는 동안 친구가 그 세상과 부딪히며 보낸 시간이 이 책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읽는 내내 찡했다.
옆사람은 이 책의 어느 즈음에서 에누마에 합류했고 그럭저럭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 뒤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나니 왠지 나까지 덩달아 씩씩해지는 기분.

개인적으로는 중학생 이상의 딸이 있는 집이라면 아이에게 한 번 읽어보길 권했으면 싶다.

ps. 책 중간중간 어린 원중이의 사진들이 반가웠는데 지금은 엄마보다 훌쩍 컸다고 하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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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이수인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우리들의 오랜 시간.. 왠지 저도 이 글을 읽다가 찡해지네요..

    1. Ritsko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읽으면서 왠지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지금의 우리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고요.
      대체 책을 쓸 시간은 언제 있었던 거예요. 혼자만 하루가 48시간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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