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사진을 좀 정리해놓고 보니 이번 여행은 정말 일정이 별로 없었네요. 애 컨디션 체크하느라 정신없어서 찍은 사진도 얼마 없고…;
여행을 다녀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체온계와 해열제…? -_-

출발하기 나흘전에 갑자기 린양이 평소에는 거의 걸린 적이 없었던(보통 콧물감기) 열감기가 걸려서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급한 마음에 3일동안 병원 세 군데를 돌아다녔는데 모두 ‘목이 부은 상태가 코, 귀 상태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니 열만 내리면 괜찮을 듯하다’라는 겁니다.

문제는 열감기는 처음인 린양이 열 때문에 삭신(?)이 쑤시니 끙끙거리며 앓는 강도가 평소 두세배는 넘는다는 점..; 정말 이대로 비행기표, 숙박 모두 날려버려야하는 건가 고민했는데 그나마 출발 전날 쯤에는 열이 나는 텀이 좀 길어지더라고요. 마지막으로 갔던 소아과 의사 선생님도 여행을 가야 한다고 하니 딱히 오래 비행기 타거나 하는 게 아니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셔서 일단 출발. 그러나 이 시점에 애미애비는 병수발에 지쳐서 여행에 대한 의욕은 바닥을 쳤고…-_-

하필이면 가는 비행기 여행은 정말 내 인생 최악이었어요..;
2시간 내내 비행기가 흔들려댔는데 어느 정도였냐하면 결국 뜨거운 음료 서비스는 돌아다닐 시간을 잡지 못해서 못 마셨을 정도였습니다. -_-;
가뜩이나 컨디션이 안 좋았던 린양은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 몇 숟갈 먹더니 좀 지나서 거하게 올려버렸어요. 어른인 저도 정말 가능하면 비행기 세우고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컨디션 안 좋은 애가 오죽했겠나 싶어요.

그 난리를 겪고 공항에서 나오니 미친듯이 폭우가 퍼붓고 있었습니다.
렌트카 빌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토이저러스.(…)
아무래도 숙소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 린양 장난감 좀 사고 간 김에 이런저런 잡화들(린양 샴푸-공주가 그려진-라든지 콧물 많이 날 때 코 밑이 헐지 않도록 인중에 바르는 크림 등등) 조달, 그리고 저녁까지 해결한 후 다시 숙소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여기가 오키나와 신도심이라 엄청 붐비는 곳이었더라구요..; 도로로 나오니 차가 제법 막히는 겁니다.
폭우와 아픈 애와 교통체증이라는 환상적인 조합으로 이렇게 여행이 시작되었지요.

얼굴이 안 찍혀있어도 표정을 알 수 있다…

숙소는 지난번과 같은 닛코 아리비라였는데 일본이 월요일까지 연휴여서 도착한 날과 그 다음날까지는 꽤 붐볐어요. 그게 아니어도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늘어났다는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뉴스 보니 저가항공들 때문에 오키나와 오는 비행기값이 꽤 내렸나보더군요.

고요해 보이지만
실은
광풍이 불고 있는 장면. -_-;

어찌저찌 빗속을 뚫고 숙소로 들어와 일찌감치 휴식!…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열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딸내미의 체온계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밤새 몰아치는 바람소리(다음날 강풍주의보가… 어쩐지 비행기가 심상찮게 흔들리더라)에 잠을 설치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별 증세 없이 열만 나서 ‘혹시 감기가 아니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드디어 콧물이 무슨 빗물마냥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정말’ 감기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둘째날은 일단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쇼핑몰에 가서 콧물감기약(한국에서 받은 건 일반감기약)과 점심거리 등등을 사서 돌아왔지요.

이런 거나 찍고 있었음..;

이 날은 이제 체온이 거의 37도 전후를 오락가락하며 열이 잡히는 시점.
린양이 바닷가에 너무 나가 보고 싶다고 우겨서 숙소와 연결되어 있는 해변가에 살살 나갔는데…
광풍에 날리는 모래를 맨다리에 대차게 맞고(진짜 종아리 맞는 기분이었음..;) 도로 숙소로 퇴각.

낫지 않으면 다음날도 아무것도 못한다고 반 협박해서 하루를 강제휴식시켰는데 그날 밤에는 드디어 며칠만에 처음으로 해열제 없이 잠이 들었어요.

그리고 밤새 옆사람은 하루동안의 여행계획을 짜놨더군요.

셋째날의 코스는…
오전에 이제 바람이 가라앉은 숙소앞 바닷가에서 모래놀이 좀 하고 놀다가
점심 즈음에 아메리칸 빌리지로 출발해서 점심식사 후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많이 들락거린 동네..;

근처 잡화점인 ETWS(에트바스라고 읽는 듯?)에서 소소하게 쇼핑 및 구경.
여기는 좀 규모가 작은 도큐핸즈(?) 같은 느낌이었는데 자잘한 잡화들도 볼만했고 뭣보다 카렐차팩 코너의 티백들이 너무 예뻐서 저도 모르게 한가득 사버렸네요. 린양은 디즈니 유아용 매니큐어 득템…;

옆사람은 ‘공원’을 좋아해요.
일본에 살 때 나중에 애를 낳으면 다치카와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는 게 로망(?)이었는데 애가 자전거 탈만큼 크기도 전에 귀국해버려서 미련이 많지요.
전날 열심히 공원을 찾더니 향한 곳은 오키나와 해군호 공원(海軍壕公園)이었습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해군호 공원 자체는 ‘1944년 미군의 함포 공격에 대비해 지하 깊숙이 파 놓은 일본 해군 오키나와 사령부의 참호가 있는 곳’으로 우리 같은 한국인들이 가기에는 썩 유쾌한 장소는 아니었어요.

지대가 높아서 전망이 좋았다는 점 정도가 기억에 남네요.

여기에 꽤 큰 미끄럼틀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도대체 ‘미끄럼틀’은 안 보이고 하염없이 엉뚱한 곳만 펼쳐져서 한참 헤매다 보니 우리가 가려던 곳은 이 공원이 아니라 바로 길 건너편에 붙어있던 작은 놀이터(…)였더라구요.

이렇게 제법 큰 미끄럼틀이 있어요. 미끄럼틀 바닥이 원통들이 모여 있어서 돌돌돌 미끄러져 내려가는 방식인데 몸이 가벼운 애들은 재미있게 타지만 어른들은 무게 때문에 타고 내려오면 엉덩이에 불이 난다고….
여기서 내려다보는 전망도 꽤 멋짐.

지난번 여행에서도 린양이 제일 신나게 ‘놀았’던건 아메리칸 빌리지의 키즈카페였는데 이번에도 가장 재미있게 논 건 여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관광객도 거의 오지 않는 곳인지 놀이터에는 온통 근처 사는 듯한 아이와 애 아빠들만 보여서 고즈넉하니 나름 좋더라구요.

원래는 여기에서 재래시장을 거쳐 국제거리로 가고 싶었는데 시간도 어정쩡하여 신도심의 ‘오키나와 메인 플레이스'(이게 진짜 건물 이름임..;; 이름조차 메인 플레이스)로 향했습니다.
여기는 대충 가와사키의 라조나 같은 곳으로 극장과 샵들이 모인 대형쇼핑몰?
차를 타고 가다보니 머리 위로 모노레일이 지나가는 게 보여서 궁금했는데 마침 역이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있더라구요. 모노레일을 타면 원래 가고 싶었던 국제거리까지 갈 수 있다길래 슬슬 걸어서 역으로 향했습니다.

오키나와의 모노레일(이름이 유이레일이라고 하네요)은 달랑 두칸짜리로 귀여운(?) 규모였는데, 그래서 저는 ‘유리카모메’ 같은 앞이 뚫린 관광용 모노레일을 상상했고 옆사람도 비슷한 걸 생각했더랬지요. 그러나 실제 타보니 그냥 ‘2호선’….
관광객용이라기보다는 현지인들 대중교통이었더라구요. 인구가 작아서 2칸짜리로도 충분한가봐요.

오모로마치역에서 출발해서 국제거리가 시작된다는 마키시역으로.
국제거리는 1.6킬로 남짓 거리가 양쪽으로 상점이 펼쳐지는 곳인데 기념품 가게 등이 밀집해 있어서 여행 마지막에 지인들에게 줄 선물 같은 것 사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2차대전 당시에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지금은 번화가가 되어서 ‘기적의 1마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네요.

린양이 아직 무리를 하기에는 좀 그래서 거리 전체를 다 보지는 못하고 초입만 살짝 둘러보는 정도로 돌아왔는데 날씨도 걷기 참 좋아서 차라리 유모차라도 있으면 애 싣고 좀더 돌아보고 싶을 정도로 좀 아쉬웠지요.

지난번 여행에서는 도심쪽으로는 전혀 와보지를 않아서 오키나와는 그냥 전체적으로 한적한 관광지로구나 했었는데 이번에 신도심 쪽을 돌아다니다보니 엄청나게 번화한 곳이었어요.
도심쪽으로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있어서 3박4일 정도 일정을 잡는다면 앞쪽 이틀은 리조트에 숙소를 잡고 마지막 하루는 도심쪽에 적당한 숙소를 잡으면 마지막날은 도심 쪽을 골고루 구경하고 공항에 가기도 훨씬 편하겠다 싶었습니다. 오키나와 여행 계획 있으신 분들은 고려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 )

리조트에서 나와 공항가는 길에 한 컷. 도심도 좋지만 이런 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한번 더 가고 싶었던 거 같긴 해요. ^^

사실 이번이 오키나와로 가는 건 마지막! 이라고 생각해서 지난번에 못가봤던 곳들 위주로 미련 남지 않게 신나게 돌아다니자! 라고 마음먹었는데 출발 전 린양 감기 때문에 원했던 만큼 보지 못하고 온 건 살짝 아쉬움이 남는 여행길이었습니다. 뭐, 인생이 항상 내 마음먹은 대로 풀리겠어요? ^^;
언젠가 다시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좀더 다른 곳들을 둘러보고 싶네요.
저는 어딘가 느릿한 분위기가 있는 오키나와가 마음에 들더라구요. ^^

6 responses

  1. nanda

    아흑 여행 앞두고 아픈 아이 데리고 감행하는 여행 후기라 더 와닿네요….그래도 느릿하고 여유로운 여행이 어딘가 “뭐 오키나와 가서 좀 쉬다 왔지!”라고 가진 자의 여유를 보태 추억할 여행 같스므니다^^

    1. Ritz

      난다님이야 아직 여행가시려면 한참 남으셨잖심..; 윤진이는 여행가실 때쯤이면 언제 아픈 적 있었나 할 거예요. 저희는 진짜 애 상태가 아직 아슬아슬한 채로 출발했더니 초반에는 정말 귀국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_- 여러모로 잊지 못할 여행이었네요. -_-;

  2. misha

    에고 열나는 아이와 함께 여행이라니…린양도 힘들지만 리츠코님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네요. 그래도 중간에 열이 잡혔다니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저도 요즘 우오오오오 후쿠오카에 가고 싶다!!! 이러고 있지만 한동안 애들 좀 크기 전까진 해외에는 안 가야지(애들 컨디션 맞추다보니 이래저래 아쉬운 부분이 많더라구요ㅠ_ㅠ) 싶어서… 아니 그보단 작년 말 남편이 친 사고로 엄청난 타격이;; 그래서 오늘도 시름시름 앓고만 있네요. 흑흑;

    1. Ritz

      기침이나 콧물도 힘들지만 열은 정말 난감하더라고요..; 게다가 이제 내렸나? 싶으면 다시 오르니 나중에는 짜증이…=_=
      요즘 후쿠오카가 그렇게 좋다면서요. 주변에도 은근 많이들 다녀오더라구요. 애 하나도 이렇게 여행 떠날만 하면 돌발상황이 벌어지는데 둘이면 아무래도 타이밍 맞추기가 좀더 힘들 것 같아요..; 역시 트윗에 쓰셨던 것처럼 혼자 훌쩍? -_-d

  3. Anonymous

    나두 일본있을때 애 없을때 둘이가보구 넘 좋아서 수빈이 낳구 다시한번 갔지 ^^ 둘다 2월에.. 아 그립다 국제거리두 넘 그립구,,,, 또 가고파~~ 글도 참 재미잇게 썼네^^

    1. Ritz

      오키나와는 겨울이 적당한 거 같아요. 여기는 춥고 그쪽은 따뜻하고.. ^^ 나중에 또 기회되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때쯤에 가보고 싶긴 하더라구요. 숙소 앞 바닷가가 너무 좋던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