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서양의 작품들이나 화풍에 대한 서적은 정말 다양한 각도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쓴 책들이 넘쳐나지만 우리나라 미술에 대한 정보는 그렇지는 않은 편인데 책 주문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서 저자 믿고(?) 주문해본 책.

다 읽고나니 조선 전기에서 후기까지 우리가 흔히 아는 화가 뿐만이 아니라 생소한 화가들까지 차근차근 짚어나간 점도 마음에 들었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늘 주장하는 작가의 지론을 반영하듯 각 화가들의 화풍과 그림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걸 이야기해주고 싶어한 게 보이기도 했다.(다만 역시나 후반부의 꽤 큰 지분을 추사 김정희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작가 탓이겠지)

20150709
능호당 이인상의 수하한담도. 이런 산수화를 보면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그림에서 여백에 적힌 글씨는 그림을 그릴 당시에 함께 있던 문인들이 남긴 것이란다. 지금으로 치면 능력자 일러스트레이터 그림 아래 붙는 코멘트?

이 수하한담도는 이인상이 친구 임매에게 준 것이었는데 왼쪽 아래에 직접

내 친구 임매는 내 그림을 애써 받고도 그의 너그러운 성품 때문에 다른 이가 가져가도 상관하지 않아 내 그림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임매가 내 소심함을 비웃을 것을 무릅쓰고 이를 (임매에게 주는 그림이라고) 쓴다.

라고 적어두었다고.
아마도 임매는 이인상이 다음에 또 그려주겠지 하는 믿는 구석으로 주변 부탁을 거절 못하고 매번 그림을 빼앗겼을 거고 그려준 이는 그릴 때마다 친구를 위해 정성껏 그렸을테니 다른 사람 손으로 자꾸 넘어가는 게 안타까웠을 듯.
옛날 옛적 아저씨들(?)의 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재미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아, 이거 어떤 건지 알 것도 같고…)에서만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는 연담 김명국, 셀카 중독도 아니고 그 시절에 특이하게 자화상을 여러 장 남긴 표암 강세황, 사대부임에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 화첩을 남기고 그 앞장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보여주는 넘은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적어놨다는 관아재 조영석, 도무지 조선시대의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는 현대적인 느낌의 그림을 남긴 북산 김수철 등등 처음 보고 듣는 이야기에 단숨에 읽고 끝났다.

매번 가깝다는 이유로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서양화 전시회들만 보러 다녔는데 올여름에는 어디 괜찮은 한국 그림 관련 전시회라도 찾아봐야겠다. 아니면 아쉬운대로 책 후반부에 펼친 현판에 대한 이야기에 나오는 현판들을 보러 창덕궁이라도.

연암 박지원의 필세설에

감상은 잘하되 수장을 못하는 이는 가난하되 자신의 눈을 저버리지 않을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는데 나야말로 좋은 그림을 직접 가질만한 재간은 없고 아쉬운대로 이것저것 꾸준히 보러다니며 내 눈은 저버리지 말아야겠다.

ps. 그나저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일종의 수련(?)을 하던 셈이라 그런가, 왜들 이렇게 평균수명이 긴 건지? 그 시절에 70 훌쩍 넘어까지 장수한 화가가 꽤 많아서 좀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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