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1986년 4월 26일, 전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가며 인류 최악의 인재로 기록된 구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태를 재구성한 5부작 미니 시리즈.
다 보고 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구가 멸망할 상황이 이미 한번 스쳐 지나갔구나, 모골이 송연해진다.

체르노빌 사고는 한 인간의 영예를 위한 집착이 부른 너무나 거대한 인재(人災)였지만 이 상황을 수습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노력은 너무나 처절해서 크게 보자면 저지른 것도 소련이지만 어쨌거나 소련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세상은 언제나 무책임한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는 선한 이들 덕에 아직까지 망하지 않은 채 굴러가고 있지는 않은지.

3,500여명의 사람이 최소한의 방호복을 입고 바이오로봇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호칭과 함께 원전 지붕을 치우기 위해 투입됐고 소련 전역의 광부들은 어느 정도 피폭을 당하는 건지 가늠도 안되는 상태로 식수원 오염을 막기 위해 불려왔다.

통상의 절차를 제대로 따진다면 절대로 불가능할, 저런 독재 체제였으니 가능하지 싶은 무한한 인력 동원을 보고 있으면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많은 수의 사람을 저렇게 ‘사용하는’, 옳지 않지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마음이 복잡해지고….

죄송합니다. 너무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었는지 제가 멍청한 것일지도요.
일이란 게 원래 이렇게 돌아갑니까?
주먹구구로 결정해놓고 사람 목숨으로 떼우는 겁니까.

드라마는 시종일관 마치 다큐멘터리인 양 감정을 절제하며 서술한다.
누구의 잘못인지를 강조하기보다 이 참담한 사태가 벌어진 후 자신의 자리에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고민하고 이를 악물고 해결책을 찾는 이들, 생각지도 못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평생을 지내온 터전에서 강제로 추방당하는 이들의 절망을 과장된 감정선 없이 담담하게 그린다.

이런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전문가가 아니면 어떤 상황인지 잘 모르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레가소프의 입을 빌어 알기 쉽게 계속 설명해주는 것도 좋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원전의 위험’보다는 국가가 체제 유지를 위해 어떤 ‘사실’을 은폐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가 더 크게 다가왔다.

명료한 메시지와 탄탄한 고증을 바탕으로 어떤 액션 신도 안 나오지만 등장인물들의 회의 장면만으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박진감과 스릴감을 뿜어낼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작품.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가슴속에 분노보다 경건함과 먹먹함만 남는다.

What is the cost of lies?

거짓의 대가는 무엇인가?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 것?
거짓의 진짜 대가란 거짓을 끝없이 듣다가 진실을 인지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다.
그때 무엇을 할 수 있나?
진실에 대한 희망조차 버리고 꾸며 낸 이야기에 만족할 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이야기에서 누가 영웅인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알고 싶은 건 잘못을 돌릴 자다.

3 responses

  1. 저도 보려고 찜해놓은 드라마인데, 포스팅하신 거 읽으니 얼른 봐야겠다 싶어요.
    체르노빌 관련해서는 http://www.yes24.com/Product/Goods/74210800 요 책도 굉장히 인상깊었어요.

    1. Ritz

      드라마는 예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작가 책과 비슷한 정서라는 모양이예요. http://aladin.kr/p/76o2Y 도서관에 가서 찾아볼 예정인데 추천해주신 책도 같이 찾아볼게요~ ^^ 드라마는 강력추천합니다.

      1. 오 요 책은 몰랐던 작품이에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