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정말 오랜만에 책을 선물 받았다.

묘한 고집이 있어서 남이 읽으라고 쥐어주는 책에 손이 잘 안 가는 편인데(그래서 책을 좋아해도 읽어야 할 책이 정해져 있는 독서토론모임 같은 데에 못 감;;) 마침 펭귄 대장정이 끝나고 다음 책을 뭘로 할까 고민하던 터라 타이밍도 좋았다.

누군가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으면 보통 그 책은 추천한 사람과 닮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추천한 사람처럼 차분했다.(그리고 문득 내가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책들은 그 사람들에게 어떤 나의 모습으로 비추고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_-)

세간에는 한참 ‘죽어도 떡볶이는 먹어야겠다'(…)는 류의 책들이 흥했고 실제로 트위터에서 짤로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샀던 책 한 권이 그 짤 한 페이지 말고 모든 내용이 너무나 취향에 안 맞은 적이 있어 생활계 에세이(?)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래서 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면 절대 접할 일이 없었을,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니 취향에 맞는 한 권이었다. 생각해보니 요즘 워낙 드라이한 독서 중이라 이런 말랑한 글은 신선하기도 했고.

이런 자신의 생활에서 주장을 끌어내는 에세이집은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슷해서 나와 생각이 다르면 한장한장이 도무지 마땅찮아 책장이 넘어가지 않고 반대로 나와 비슷한 면이 많으면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음이 통한 마냥 읽는 내내 즐겁다.
언뜻 육아를 하고 있는 전업주부인 나와 씩씩한 싱글 라이프를 영위 중인 작가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싶지만 작가가 마음 속에 정해진 루틴대로 집안일을 해나가며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을 때 얻는 소박한 일상의 행복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그래, 내가 주부로서 얻는 만족감이 이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어’ 라고 덩달아 숟가락을 얹게 된다.

서로 소재도 다르고 문체도 달랐지만 언뜻 초등학교 고학년쯤 집에 굴러다니던(아마 이모의 취향이었을) 작가 유안진의 에세이 책을 열심히 주워 읽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갈한 문장 속에 흘러가는 조근조근하고 단호한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등줄기를 쭉 펴게 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냥 이 한 권을 읽으면서 길어진 칩거(…) 생활로 흐늘해지는 정신을 오랜만에 다잡았다.

어떤 책이든 그렇겠지만 유난히 취향을 많이 탈 내용이라(실제로 리뷰들을 좀 둘러보니 평이 극과 극이더란) 이 사람이 사는 식으로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면 그게 정답이 아니니 재미없을 테고 자신의 생활을 구축해가는 과정과 거기에서 얻는 기쁨에 대해 공감한다면 취향에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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