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ula Rasa

집앞 꽃집 인스타 스토리에 온라인으로 살까말까 몇번 고민했던 라넌큘러스 이글루퐁퐁이 떴길래 슬쩍 “오늘 뭐 예쁜 꽃 있나요?”라고 디엠을 보냈더니 친절하게도 매장 꽃들을 쫘악 한바퀴 돌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줬다.

오늘도 예쁜 꽃은 한가득이고(이 집 주인 취향이 은근 내 취향) 요즘 가능하면 하루에 한번은 바깥 바람을 쐬고 들어오려고 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옷을 챙겨 입으며 옆사람에게도 나갈 거냐고 물으니 따라 챙겨 입길래 같이 집을 나섰다.

그렇다고 어디 대단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고 보통 근처 마트까지 갔다 온다든지 반대 방향으로 가자면 빵집을 둘러 온다든지 하는 정도.

분명히 해가 쨍한 걸 보고 챙겨 나왔는데 날씨가 요사해서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바람도 차서 어디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고 마트에서 간단히 필요한 것 사고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오늘은 저 이글루 라넌을 보고 왔어요! 했더니 그럼 이번에는 화이트&그린 톤으로 만들어볼까요, 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이것저것 맞춰주는데 라일락, 마트리카리아(계란꽃처럼 생긴 것) 등등으로 소박하고 봄 느낌 물씬 나는 한 다발이 만들어졌다.
마트리카리아는 예전에 온라인에서 한다발 샀을 때는 풍성해도 돈 주고 산 꽃이라기보다 어딘가 앞산에서 왕창 뽑아다 꽂아놓은 모양새라 영 아쉬웠는데 적은 양이라도 저렇게 섞여 있으니 훨씬 귀엽게 돋보인다. 라일락 향도 너무 좋아서 향과 모양새 모두 만족한 한 다발.
집에 와서 보니 이글루 라넌도 일부러 화이트톤, 그린톤 하나씩 챙겨 넣어준 듯.

색감이 어딘가 부케같기도 한 꽃다발을 들고 평소대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려다가 문득 옆사람에게 대신 결제를 하라고 했다. 이렇게 들고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옆의 남자가 꽃을 사줬나보네’ 할테니 그 짐작에 부응해야 하지 않겠어.

꽃을 사고 나왔더니 어느새 또 해가 쨍하게 비치고 있어 평소보다 약간 더 길을 돌아 귀가.

그렇게 또 지나가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