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대략 30년만에, 미루고 미뤘던 숙제를 끝냈다.
린양 도서관 가는 길에 빌려다달라고 부탁했는데 가져온 책이 하필 연식이 상당해서 왠지 상황에 더 어울렸다.

고1 때 문학 선생님이 2학기 중간고사에 여름방학 숙제로 나왔던 한국 현대문학 작품들에서 주관식 10문제가 나올 건데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대단히 ‘사소한’ 답이라 안 읽고는 못 풀 거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대충 기억나는 게 김동인의 「배따라기」, 김유정의 「동백꽃」 , 염상섭의 「삼대」 뭐 이런 류의 당시 입시 전 필독서들이었고 그 중에 최인훈의 「광장」이 있었는데, 작품 수가 꽤 많아서 그랬나 당시 친했던 친구랑 장편소설만 나눠서 내용 정리해서 공유하기로 했더랬다. 책 읽는 걸 싫어하지도 않고 읽는 속도도 빠른 편이라 어지간하면 직접 다 읽었을텐데(「삼대」 같은 건 당시에 꽤 재미있게 봤었음)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이기도 하지.

아무튼 실제로 시험 문제는 예고한대로 자잘하게(…) 나와서 시험이 끝나고 다들 답 맞춰보면서 나오는 오답만으로도 한참 웃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배따라기」 주인공 부인이 주인공에게 장터에서 사다달라고 한 물건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북어’를 쓴 친구(왜 북어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생각은 안 나는데 갑자기 뇌리에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 어쩌고가 스쳐지나갔다고…)와 「동백꽃」의 주인공 아버지 직업은 무엇이었나 에 ‘고자’를 쓴 친구(작중에 점순이의 ‘너희 아버지 고자지?’라는 대사가 있다)는 이 나이에도 한번씩 생각난다.

그리고 저 「광장」에서 나온 질문은 ‘주인공은 어느 나라로 향하고 있었는가.’
맨 처음에 ‘인도’가 생각났던 걸 보면 분명히 친구는 제대로 요약해서 넘겨줬던 것 같은데 얕은 깜냥에 전쟁이 끝나고 왜 갑자기 인도까지 가겠어? 라며 느낌상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은 ‘인도네시아’라고 당당하게 써서 틀렸다.(부족한 현대사 수업과 얄팍한 지리 지식의 폐해…😑)

그 뒤로 「광장」은 이미 문제를 틀린 작품을 마저 읽는 게 왠지 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내 눈으로 언젠가 ‘인도’로 향하는 주인공을 봐야할 것 같기도 한 작품이었는데 마침 요즘 댕기는 책도 없어 도전.

첫장을 펼치니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 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간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 시절 첫장만 펴봤어도 한 문제 건졌을텐데….🙄

아마도 고1 때 이 책을 읽었으면 그 당시에는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전쟁 전후의 혼란한 상황과 주인공의 방황이 좀더 진하게 다가왔을테고 일기장에 ‘광장’과 ‘밀실’에 대해 한 페이지 가득 주절거렸을 법한데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읽은 「광장」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젊은이의 요령없는 방황은 안쓰럽고 저 시절 소설 남자 주인공들은 도대체 ‘여자 젖가슴’ 없으면 이야기가 안되는 건가, 현대문학 남자주인공들은 모아놓고 봐도 누구 하나 호감이 가는 이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 마치 누가누가 더 찌질한가 배틀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이래서 가끔 작품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정한 나이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마침 얼마전에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더니 남에서도 북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백석과 이명준이 어느 정도 닿아 있어서, 그 시절 혁명이 성공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북으로 향했을(백석이야 원래 재북 작가지만) 지식인들 중에 기대와 너무 달라 헤매었을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지 새삼스럽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장.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을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p.173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품 자체는 이 나이에 읽어도 어느 문장 하나 흘릴 것 없이 잘 쓴 명작이었다.

이 책 서문에도 이미 작가가 초판 이후로 꽤 많이 손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그 뒤로도 계속 조금씩 손을 봐서 내가 본 책과 최종본은 또 다른 부분이 있는 모양.
내가 본 책에서는 주인공이 전쟁이 터지고 난 후 서울에서 만난 친구에게 갑자기 우월감에 불타서 잔인하게 굴더니 옛 애인을 겁탈하려다 마는 장면이 나와서 앞과 뒤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성격에 미묘하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가가 마지막으로 개정한 판본에서는 그 가혹한 행동이 꿈이었다고 수정했다고.
끊임없이 개작을 할 수 있었다니 이 책이 얼마나 꾸준히 팔리고 있었는가(증쇄가 없으면 개작도 없다…) 알 수 있고 오탈자 정도가 아닌 아예 이야기가 달라지는 수준의 수정이라 작가 본인이 평생에 걸쳐 이 책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본 김에 최종본까지 마저 봐야할까 고민 중.

저 ‘인도’ 때문에 그 후로 관련 기사 같은 게 보이면 가끔 저 포로들은 무사히 자리잡고 잘 살았을까, 이명준이 무사히 인도에 도착했으면 그후로 삶이 나았을까,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당시 실제로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는 76명이었는데 그 안에서 남미행/인도행으로 갈렸다고.
당시 인도는 친공적 성향이 있어서 남미에 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은 인도를 선택하겠다는 포로들을 ‘빨갱이’로 보고 배 안에서도 서로 반목했다고 한다.
남과 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고 배를 탄 사람들이 그 안에서 다시 둘로 갈라졌다니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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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responses

  1. 아 정말 공감해요 ㅎㅎ 어릴 때는 읽고 나서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크으 하면서 싸이월드(ㅋㅋ)에도 옮겨적고 그랬는데 수업 준비하며 다시 보니 이 자식 여자가 안 자준다고 월북했잖아? 하고 한심스럽게만 느껴지더라고요ㅠ

    1. Ritz

      제가 바로 그 감동해서 일기장에 막 쓰고 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좋았을걸! 했어요. 이 나이에 읽으니 기승전 여자인 거냐(-_-) 하게 되어서 작품은 좋았으나 내가 너무 세월에 찌들어 버렸더라고요.( ”)
      중학교 때 거의 제 바이블(…)이었던 데미안도 지금 다시 읽으면 ‘그래, 니들 예쁜 사랑 해라’ 아니겠어요. : )

  2. 엄청 예전에 송두율 교수가 귀국하고 나서 구속수감이 되었지요. 그때 담임선생님의 추천 및 선물로 광장을 처음 보았습니다. 밀실없는 사회는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강압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밀실만 혹은 광장만 있는 사회도 또다른 억압일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바다를 택했을지도 모르구요. 역사의 흐름 앞에 선 경계인의 심정이란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작가분도 여러 번 개작을 거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쳐도 답이란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할 수 있으니까요.

    1. Ritz

      저는 잠깐이나마 책을 만들었다보니 증쇄 때마다 계속 고쳐나갔다는 게 너무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저러면 아예 필름을 새로 뽑아야 해서(필름값이 아주 많이 드는 건 아니지만) 책을 새로 만드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출판사에서 그렇게 해줄 만큼 판매부수가 끊임없이 나오고 작가를 대접해준다는 거라서요. ^^;

      나이 먹고 읽으니 이런 것만 보이더라고요.

      1. 아마 블로그 포스팅에도 나온 것처럼 수능에 몇 번 나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분도 당대를 빛낸 문호였고… 책을 만드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 책을 쓰는 사람의 역할이 모두 다른 것처럼 위치에 따라 주목하는 부분은 각자가 다 다른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3. 잘 읽었습니다!

  4. 광장의 첫문장은 워낙 유명해서 학력고사 시대에도 자주 지문으로 나왔어요 ㅎ

    1. Ritz

      은근 입시 단골이었다더라고요~ 저 수능 때는 결국 안 나왔던 것 같아요.(나왔어도 안 읽어서 몰랐겠지만…)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5.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소설도 아니었던데다가 딱이 읽어보라는 말도 없던 이 소설이 갑자기 국어 시험 문제로 나왔었지. 그냥 소설 제목을 묻는 단순한 문제였지만 주관식으로 출제된 문항의 답을 제대로 적은 놈은 반에 한 두명 정도. 늘 그렇듯 애매하게 알고 있는 문제의 오답들은 아이디어 천국이기 마련인데 나온 답들은 ‘거제도’,’포로수용소’,’반공포로’,’제3국’ 기타 등등. 저 문제를 틀려 놓고 아니 대체 ‘광장’이 뭐야 하고 도서실도 찾아보고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도 찾아봤지만 책을 손에 넣을 수가 없었는데… 이게 그 당시의 상황이 작용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봤지.
    나야 말로 그 뒤에 이 책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네. 동네 도서관에 있으려나…

    1. Ritz

      시절에 따라 위험한 내용이었기도 했을 듯요. ‘북한’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시되던 때도 있었으니…
      의외로 입시에 꽤 자주 나왔던 작품이라네요. 도서관에는 어지간하면 있을 거예요. 이 나이 먹어서 보는 그 시절 20대의 방황은 안쓰럽고 갑갑하고 짠하네요.

  6. 나는 왜 브라질에 간다고 생각했나…

    1. Ritz

      뭔가 다큐를 봤던 거랑 섞인 거 아닐까? 나는 이번에 찾아보기 전까지는 남미는 생각도 못했네. 그 시절에 거기까지 가려면 대체 얼마나 걸렸을까…

  7. 동백꽃 주인공 아버지 직업에서 터졌습니다. 아니 그게 직업이 되면 대체….

    1. Ritz

      곤란한 직업…( ”) 채점하는 선생님도 웃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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