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 30년만에, 미루고 미뤘던 숙제를 끝냈다.
린양 도서관 가는 길에 빌려다달라고 부탁했는데 가져온 책이 하필 연식이 상당해서 왠지 상황에 더 어울렸다.
고1 때 문학 선생님이 2학기 중간고사에 여름방학 숙제로 나왔던 한국 현대문학 작품들에서 주관식 10문제가 나올 건데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대단히 ‘사소한’ 답이라 안 읽고는 못 풀 거라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대충 기억나는 게 김동인의 「배따라기」, 김유정의 「동백꽃」 , 염상섭의 「삼대」 뭐 이런 류의 당시 입시 전 필독서들이었고 그 중에 최인훈의 「광장」이 있었는데, 작품 수가 꽤 많아서 그랬나 당시 친했던 친구랑 장편소설만 나눠서 내용 정리해서 공유하기로 했더랬다. 책 읽는 걸 싫어하지도 않고 읽는 속도도 빠른 편이라 어지간하면 직접 다 읽었을텐데(「삼대」 같은 건 당시에 꽤 재미있게 봤었음) 지금 생각해보면 별일이기도 하지.
아무튼 실제로 시험 문제는 예고한대로 자잘하게(…) 나와서 시험이 끝나고 다들 답 맞춰보면서 나오는 오답만으로도 한참 웃을 수 있을 정도였는데 「배따라기」 주인공 부인이 주인공에게 장터에서 사다달라고 한 물건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북어’를 쓴 친구(왜 북어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생각은 안 나는데 갑자기 뇌리에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 어쩌고가 스쳐지나갔다고…)와 「동백꽃」의 주인공 아버지 직업은 무엇이었나 에 ‘고자’를 쓴 친구(작중에 점순이의 ‘너희 아버지 고자지?’라는 대사가 있다)는 이 나이에도 한번씩 생각난다.
그리고 저 「광장」에서 나온 질문은 ‘주인공은 어느 나라로 향하고 있었는가.’
맨 처음에 ‘인도’가 생각났던 걸 보면 분명히 친구는 제대로 요약해서 넘겨줬던 것 같은데 얕은 깜냥에 전쟁이 끝나고 왜 갑자기 인도까지 가겠어? 라며 느낌상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같은 ‘인도네시아’라고 당당하게 써서 틀렸다.(부족한 현대사 수업과 얄팍한 지리 지식의 폐해…)
그 뒤로 「광장」은 이미 문제를 틀린 작품을 마저 읽는 게 왠지 지는 기분이기도 하고 내 눈으로 언젠가 ‘인도’로 향하는 주인공을 봐야할 것 같기도 한 작품이었는데 마침 요즘 댕기는 책도 없어 도전.
첫장을 펼치니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를 실은 인도 배 타고르 호는, 흰 페인트로 말쑥하게 칠한 삼천 톤의 몸을 떨면서, 물건처럼 빼곡히 들어찬 동중국 바다의 훈김을 헤치며 미끄러져간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 시절 첫장만 펴봤어도 한 문제 건졌을텐데….
아마도 고1 때 이 책을 읽었으면 그 당시에는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전쟁 전후의 혼란한 상황과 주인공의 방황이 좀더 진하게 다가왔을테고 일기장에 ‘광장’과 ‘밀실’에 대해 한 페이지 가득 주절거렸을 법한데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읽은 「광장」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젊은이의 요령없는 방황은 안쓰럽고 저 시절 소설 남자 주인공들은 도대체 ‘여자 젖가슴’ 없으면 이야기가 안되는 건가, 현대문학 남자주인공들은 모아놓고 봐도 누구 하나 호감이 가는 이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 마치 누가누가 더 찌질한가 배틀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이래서 가끔 작품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정한 나이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마침 얼마전에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더니 남에서도 북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백석과 이명준이 어느 정도 닿아 있어서, 그 시절 혁명이 성공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북으로 향했을(백석이야 원래 재북 작가지만) 지식인들 중에 기대와 너무 달라 헤매었을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지 새삼스럽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장.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을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p.173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품 자체는 이 나이에 읽어도 어느 문장 하나 흘릴 것 없이 잘 쓴 명작이었다.
이 책 서문에도 이미 작가가 초판 이후로 꽤 많이 손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그 뒤로도 계속 조금씩 손을 봐서 내가 본 책과 최종본은 또 다른 부분이 있는 모양.
내가 본 책에서는 주인공이 전쟁이 터지고 난 후 서울에서 만난 친구에게 갑자기 우월감에 불타서 잔인하게 굴더니 옛 애인을 겁탈하려다 마는 장면이 나와서 앞과 뒤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성격에 미묘하게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작가가 마지막으로 개정한 판본에서는 그 가혹한 행동이 꿈이었다고 수정했다고.
끊임없이 개작을 할 수 있었다니 이 책이 얼마나 꾸준히 팔리고 있었는가(증쇄가 없으면 개작도 없다…) 알 수 있고 오탈자 정도가 아닌 아예 이야기가 달라지는 수준의 수정이라 작가 본인이 평생에 걸쳐 이 책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도 절실하게 다가온다. 본 김에 최종본까지 마저 봐야할까 고민 중.
저 ‘인도’ 때문에 그 후로 관련 기사 같은 게 보이면 가끔 저 포로들은 무사히 자리잡고 잘 살았을까, 이명준이 무사히 인도에 도착했으면 그후로 삶이 나았을까,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당시 실제로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는 76명이었는데 그 안에서 남미행/인도행으로 갈렸다고.
당시 인도는 친공적 성향이 있어서 남미에 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은 인도를 선택하겠다는 포로들을 ‘빨갱이’로 보고 배 안에서도 서로 반목했다고 한다.
남과 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고 배를 탄 사람들이 그 안에서 다시 둘로 갈라졌다니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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