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저녁때는 대학로 사무실과 업무 관련으로 친분이 있는 분을 만나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이분은 애니메이션 쪽으로는 전혀 취미가 없으신 분인데 사무실 사람들이 그쪽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아시고 ‘일부러’ ‘굳이’ 인터넷을 뒤져서 마침 당일날 개업 1주년 기념으로 코스프레 파티(…)를 하는 호프집을 알아오셨더군요.

가려던 곳 앞에 붙어있던 안내문

장소가 아키하바라 근처였는데, 도착하고 보니 6시 45분 정도였습니다. 매장 시작은 7시부터라길래 일단 건물 4층에 있다는 가게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만.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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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계단까지 밀려나와서 주욱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모인 사람들이 묘하게도 모두 비슷비슷한 데다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염이 뿜어져 나와서 그 기에 밀려 저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선배와 괴수, 저 셋 다 ‘기… 기에 밀려보긴 처음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다나카 씨는 ’15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왜 그러세요?(한국어 매우 능통하심)’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묻더군요. -.ㅜ
다나카 씨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 엄청 궁금하셨었는지 계속 ‘기다렸다 들어가보자’는 사인을 보냈으나 옆에서 선배가 ‘아하하, 실은 일본에 오면 제대로 된 오코노미야키를 꼭 먹어보고 싶었습니다!’ 하며 목적지를 돌려버렸습니다(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어째 공포 체험만 하게 되는 것 같기도…-_-).

제가 갔던 곳은 왼쪽

그리하여 가게 된 곳이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를 한다는 big-pig였습니다.
매장 안은 꽤 아늑한 데다가 사람도 그런대로 많은 편이었고, 왠지 회사 회식같은 자리로 이용하기에 적당할 것 같은 분위기더군요(실제로 우리가 갔을 때 회식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음).
진짜 히로시마 사람들이 히로시마 식으로 오코노미야키나 다른 음식들을 만들어 파는 곳이라는데 히로시마 식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설명을 들었으나 이미 잊어버렸음..;) 입맛에는 잘 맞았습니다.

요것이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
야채와 계란 지단 사이에 찹쌀떡이 얇게 들어간 것도 있었고 치즈가 들어간 것도 있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찹쌀떡이 얇게 들어간 쪽이 씹는 맛이 쫄깃해서 마음에 들더군요.

그밖에도… 이 날 먹은 요리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어찌나 끊임없이 주문을 하시는지 연이어 계속 나오는 요리에 거의 배가 터질 지경이었습니다.(그 와중에도 끄떡없었던 것은 역시 괴수 뿐…)

우리나라로 치면 김치 같은 것이라더군요. 가운데 흰색은 멸치.
돼지곱창과 숙주나물
따끈하게 데운 굴. 저야 굴은 못 먹지만 옆 사람들 말로는 엄청 맛있었다고 함.
요건 치즈 오코노미야키
후식으로 나온 유자 샤베트
서비스 후식치고는 유자향이 엄청 찐하고 제대로 된 맛이었습니다.

대강 Big pig에서 식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일본 라면을 제대로 하는 집이 있는데 가보시겠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숨도 못쉴만큼 배가 불러 씩씩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괴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좋지요-‘(…)
그리하여 정말 잘 하는 라면집이 있다는 아카사카로 향했습니다.

가면서 배라도 좀 꺼지도록 하자는 의미로 걷기 시작했는데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곳이 바로 마루노우치 빌딩 꼭대기였습니다.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것이 도쿄 타워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뜻밖에 도쿄 시내 밤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무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도쿄에 올 때마다 매번 가는 곳만 가다보니 정작 다양한 경험은 해보지 못했었는데 여러모로 눈도 호강하는 날이었지요.

이것이 바로 이날 먹은 8가지 토핑(?)이 모두 들어간 특제 라면!
아래쪽에 빨간 것은 명란알이었습니다.

마루노우치 빌딩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향한 곳은 아카사카에 있다는 큐슈 라면집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아카사카점이 가장 맛있대요.

안내하시는 분이 정말로 맛있다고 몇 번을 강조하셨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정말로 맛이 대단했습니다. 전날 먹었던 라면도 맛있었지만 이 라면은 또 다른 개성이 있더군요. 배가 불러 옆구리를 푹 찌르면 오코노미야키가 주르륵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그래도 라면은 꾸역꾸역 들어가더이다. -.ㅜ
사진에 보이는 대로 재료도 아낌없이 들어간 데다가 국물이 정말로 진하면서 느끼한 맛이 전혀 없어서 배는 미친듯이 부른데 거북하지는 않더군요.
혹 도쿄에 가실 일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시라고 약도는 큰 사이즈로 올려둡니다.

내가 시켰던 비엔나 커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블루마운틴으로 통일

라면을 다 먹고 난 후 간 곳은(…) 시내에 있는 어느 카페였습니다. 커피를 제대로 끓이는 가게라는데 커피 한 잔이 라면 두 그릇 값이더군요(…) 그래도 커피 마니아를 아버님으로 둔 선배 말로는 정말로 제대로 향을 우린 커피였다고 하네요.
가게 분위기는 마치 개화기 서울 시내의 어느 문학 카페 같았습니다(왠지 그 김동인, 이상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궁상 떨던 분위기랄까..;). 고즈넉하고 조용한 데다가 무엇보다 ‘혼자 와서 고요히 책을 보며 차를 마시기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카페 주인분도 자신이 끓이는 커피에 대해 자부심이 상당하더군요. 가능하면 설탕이나 프림은 넣지 말고 드셨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저같은 경우는 비엔나 커피의 크림이 워낙 적당히 달고 맛있어서 설탕이나 프림 없이도 맛있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5시 반쯤 만나서 밤 12시 넘어까지 내내 달려라 달려 하는 기분으로 먹고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아오니 그야말로 배는 아직도 불러서 터질 것 같고 낮에 걸어다닌 여파로 다리는 쑤셔대는지라 들어오는 길에 샀던 입욕제 하나 풀고 욕조에 들어가 낮에 산 후르츠 바스켓 신간을 붙잡았는데 내용이 꽤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다 읽고 나니 1시간이 훌렁 지나갔더군요. 나오는데 순간 휘청 하길래 이상해서 시계를 봤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숙소 1층에 내려가 우롱차 한캔을 뽑아와서 그 자리에서 모두 마셔버리고 수분 보충 후 완전히 뻗어버렸네요.

14 responses

  1. 리츠코

    롯>일본 음식이 그리울 때마다 이 포스트를 보며 마음을 달래고 있지.. -.ㅜ

  2.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글이야. 푸하하. 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의 ‘기’에 눌릴 지경^^.

  3. 리츠코

    이쁜감자>저날 추워서 옥상에 나갔어도 별로 안 좋았을 거예요..; 요즘 대개 빌딩 옥상은 일반인에게는 폐쇄일테니 아무래도 찾기 힘들 듯?

  4. 이쁜감자

    실외.. 그러니까 빌딩 옥상에서 찍은줄 알았습니다…

    사진을 보며 시티헌터에서 사에바 료가 어느 리포터를 데리고 신주쿠의 빌딩 옥상에서 신주쿠 야경을 보여주는 장면을 생각했는데…
    음…. 역시 그런 빌딩 옥상에는 못올라 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