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인 존 러스킨,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 그리고 존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레이(제목이 에피 러스킨도 에피 밀레이도 아닌 것이 의미가 있다)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화가나 그림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보다보면 한번쯤은 만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접할 때마다 기이하기 짝이 없다.
당대의 명망높은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은 가족끼리 알던 사이였던 집안의 딸 에피 그레이와 결혼을 했는데(존 러스킨이 31세, 에피 그레이가 19세), 결혼한 이후 6년이 지나도록 그녀와 성적인 관계를 전혀 맺지 않았다.
존 러스킨이 에피와 부부관계를 갖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많이 알려진 건 존 러스킨이 그동안 동경해 마지않던 우아하고 위대한 고대의 조각들과는 달리 체모가 있는 아내의 국부에 극도로 실망할 것 같다는 성심리적 장애가 있었다는 설, 그 외에도 동성애자였을 수 있다는 설과 10대 초반의 여자들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는 설(러스킨이 에피를 처음 만난 건 에피가 12살 때였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인 루이스 캐롤과 비슷한 이유인 후자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여자아이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소아성애자는 아닌데 성인 여성에게 성인 남성으로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에피 그레이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는 아이를 싫어한다든지 종교적 동기, 내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한다든지 다양한 이유를 주장했지만 작년에 마침내 진정한 이유를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그의 아내로 삼지 않은 이유는 그가 첫날밤에 나에게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절망감, 과도하게 결혼생활에 개입하는 시부모들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던 그녀는 존 러스킨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떠난 스코틀랜드에서 함께 머물던 화가 존 밀레이와 사랑에 빠지고 (영화에서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지만) 결혼 6주년이 되는 날 결혼반지와 집 열쇠를 러스킨에게 돌려보내며 교회 법정에 결혼 ‘무효’ 소송을 냈다. 그리고 소송을 접수한 교회 법정은 1854년에 ‘고칠 수 없는 발기부전’을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화했고 이 사건은 당시 막 터진 크리미아 전쟁 관련 뉴스마저 무색하게 할 정도로 대중들에게 큰 스캔들이었다고.(공개적으로 제대로 멕이고 이혼한 에피)
러스킨은 마지막까지 밀레이에게 ‘우정은 변치 말자’고 호소했다는데 그 호소를 묵살하고 두 사람은 결혼해서 무려 4남 4녀(…)를 두고 보란듯이 40년간 해로했다.
실제 이야기가 어지간한 일일 드라마를 능가할 내용이다보니 그런가, 영화 자체는 오히려 좀 밋밋하고 밀레이와 에피의 감정이 애틋해지는 과정을 좀더 깊게 그렸으면 좋았을 텐데 점잔 뺀 느낌이었다.
엠마 톰슨이 맡은 역이 참 좋았는데 찾아보니 제작과 각본이 엠마 톰슨.(…)
다코타 패닝의 피폐해져가는 어린 신부 연기도 꽤 좋았다.
책으로 접할 때보다 영상으로 보니 한층 더 기이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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