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웨인 티보 그림을 처음 봤을 즈음에 알게 된 화가 중 한 명이 칼 라르손.

세상 빛을 모두 받은 듯 화사한 색감에 동화 삽화 같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번에 화가에 대한 책이 나왔길래 별 고민 없이 주문했다.

Esbjorn doing his homework, 1912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보니 그제서야 소년 뒤편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보인다.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그림만 보고 막연하게 넉넉하게 자라 세상을 밝게 보는 사람이었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정을 방치한 무책임한(본인이 힘들어지자 뻔뻔하게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와 아내와 아들에게 빌붙기까지 하는) 아버지를 둔, 대신 아이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전력을 다한 훌륭한 엄마와 외할머니 밑에서 하나뿐인 동생을 잃을 만큼 지독한 가난을 견디며 가진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환경을 바꿔나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동화 속 등장인물 같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화가의 여덟이나 되는 자녀들이었고─이제 그림 속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짚을 수 있다─ 배경은 화가가 부인과 함께 평생 조금씩 개조하며 소중하게 가꾸고 살아간 집 ‘릴라 히트나스’라는 걸 알게 됐다.

화가는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였는지 아이들이 안락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자랄 수 있도록 노력했고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직접 한장한장 남겼다. 한 집에 여덟 명의 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게(그리고 그 중에는 성인이 되기 전에 잃은 아이도 있었으니 그 절망은 얼마나 깊었을지 가늠할 수도 없다) 이 그림 속 모습처럼 ‘동화’같지만은 않았으리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화가의 시간은 이렇게 아름답게 남았다.
모르고 봤을 때도 예쁜 그림이었지만 바닥까지 어두운 시간을 보낸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그렸다고 생각하니 책을 읽기 전보다 더 그림이 눈부시다.

간간히 해상도가 좀 아쉬운 도판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미처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잔뜩 실려있고 그 그림에 얽힌 이야기도 알 수 있어서 좋았던 책.

다 읽고 나니 그의 아내인 카린 라르손에 대한 이야기에도 눈이 갔는데, 칼 라르손이 유학 중에 만나 결혼한 그녀는 마찬가지로 화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으로, 칼과는 다르게 부유한 집의 딸이었고 릴라 히트나스 역시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준 집이었다.

그 당시에 대부분 그랬듯이 그녀 역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동안 본인의 화가로서의 길은 포기했지만 대신 그 열정을 집을 가꾸는 데에 아낌없이 퍼부었고 칼 라르손의 그림을 유명하게 만드는 데에 분명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배경은 모두 그녀의 작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칼 라르손의 작품 중 일부는 어찌 보면 부부의 공동 작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지금 봐도 도무지 촌스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실내는 어디선가 본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케아 창립자의 모티베이션이 되었다는 글을 보니 이케아 특유의 분위기가 여기에서 온 것이었구나, 새삼스럽다.
그림 속 아이들이 입고 있는 (요즘 입어도 될 듯한) 품이 넉넉하고 세련된 옷들은 그녀가 아이들이 뛰놀기 편하도록 직접 지어 입힌 것이라는데 지금도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불릴 법한 핫한 디자인이라 결국 이 분이 ‘북유럽 스타일 아동복’의 원조시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한참 인상파 화가들이 세를 넓혀가던 시기에 단호하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그리는 데에 몰두했던 화가는 인상파와는 다른 의미로 길게 역사에 남았고 그녀의 부인은 그릴 수 없는 환경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남겼는데 그 센스가 시간을 초월했으니 여러모로 멋진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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