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몇 살 때쯤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집 신발장을 뒤지다가 우연히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지나 사우디에 일하러 가셨던 아빠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찾은 적이 있다.
지금이야 자세한 내용은 기억도 가물하지만 평소에는 말수도 없는 양반이 편지에서는 자라는 걸 옆에서 볼 수 없는 딸에 대한 안부, 받은 사진에 머리를 너무 세게 묶은 게 아니냐는 참견 등등을 특유의 달필로 빼곡하게 채워 보냈다는 게 믿을 수 없이 신기했었다.

그 편지 생각이 나서 그랬나, 인스타에서 언뜻 책 제목을 보고 갑자기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생의 자독自瀆과 자학自虐 속에 그의 생을 단축시킨 고독과 빈곤의 예술가

석남 이경성의 글 중에서

이중섭은 유학시절에 만난 일본여성 마사코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두었으나 해방과 전쟁이 맞물리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휴전 직후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친정으로 떠났고, 그때부터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가 시작되었다.

모든 편지마다 백방으로 방법을 찾은 기색이 역력하고 간절하게 가족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당시 시대상으로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게 녹록치 않은 일이었고 간신히 무역선의 선원 신분으로 건너가 일주일 동안 가족이 여관방에 모여 보낸 단 한번의 시간이 마지막이 되었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안심하시오. 가난해도 끄떡없는 우리 네 가족의 멋진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서로 참으로 사랑하고, 더욱더 사랑해서, 하나가 되어 올바르게, 힘차게 살아봅시다. 진심으로 나를 믿고 기뻐해주구려. 화공 대향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실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테니 끈기 있게 기다려봐주오. 남덕의 귀여운 모든 것을 힘껏 안고 긴 입맞춤을 보내오. 사흘에 한 번은 편지를 받고 싶은데… 보내주기를.

p.60

처절하고, 간절하며, 끝없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저 무수하게 반복되는 ‘미래의 확신을 가지자’는 문구가 내 눈에는 저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너무나 괴로워서 읊조리는 주문呪文과도 같아 보인다.

이번에 아빠가 빨리 가서… 보트를 태워주마. 아빠는 감기로 닷새 동안 누워 있었지만, 이제는 다 나아 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어서어서 전람회를 열고서…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잔뜩 사 가지고… 갖고 갈 테니.… 몸 성히 기다리고 있어다오.

아빠 ㅈㅜㅇㅅㅓㅂ

p.212

이중섭은 반드시 두 아들에게 자전거를 한 대씩 사주겠다는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고, 마흔의 젊은 나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홀로 죽어갔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 사연을 보면 예전보다 훨씬 몰입하고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편지 말고는 서로의 안부를 알 방법도 없으니 오가는 사진으로 자라는 아이를 보며 발을 굴렀을 이중섭의 초조함도 혼자 아들 둘을 키우며 남편이 보내는 열렬한 편지에 마음을 기대었을 저 부인의 마음도 모두 안타깝다.

이중섭과 이남덕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2/2016060202559.html

검색하다가 찾은 이중섭 부인의 인터뷰 기사.(놀랍게도 2022년 현재도 살아 계신다고;;)
읽다보면 7년을 함께한 기억으로 60년을 살아낸 저 부인의 마음이 먹먹하고 본인이 받은 그 소중한 편지들이 회수되지 않아 주인의 손에 없다는 점과 가격을 따질 수 없을만큼 이중섭의 그림은 비싸졌는데 정작 가족들의 삶이 그리 넉넉치 않아 보여 다시 한번 세상의 부조리함에 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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