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2000.09.07

지난주에 얼른 인터넷 예매를 해서 트로이를 보고 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본 사람들의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고 갔습니다만, 그래서 그런지 훨씬 더 재미있게 보고 왔네요.
제목은 트로이지만, ‘아킬레스와 헥토르’라고 지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 만큼 이 두 인물의 비중이 컸습니다. 그리고 연기자들도 상당히 호연이었지요.

우선, 여신들의 말도 안되는 유흥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신들은 완벽하게 배제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점은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사실 이 트로이는 어느 정도 판타지 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더군요.
여기에서 트로이 전쟁은 인간들의 ‘전쟁’이며 ‘야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은 그냥 신일 뿐 작품에 전혀 개입하지도 않고, 신전을 부수고 모독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요.
이야기도 파리스가 헬레네를 몰래 빼돌려 트로이로 돌아오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즉 신들의 개입에 대해 그다지 언급할 필요가 없을 때부터지요.
헥토르는 ‘신이 대신 활을 쏘아주는가’라고 반문하는 현실주의자이며, 신의 아들이라고 공인된 아킬레스의 경우 극중에서 자신의 불로불사에 대해 부정합니다. “화살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면 내가 왜 투구와 갑옷을 입겠는가” 라고.

이 에릭 바나는 잘 빠진 톰 크루즈 같음..;

얼뜨기(?) 역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올랜도 블룸

영화는 반듯한 모범생과도 같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 당시로는 드물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싸우는 반항아 아킬레스, 이 두 ‘인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왕 프리아모스를 너무나 멋지게 연기한
아라비아 로렌스의 피터 오툴

영화를 통해 보니 책으로 읽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각 캐릭터들의 매력이라든가, 파리스가 얼마나 얼치기에 바보였는지를 잘 알 수 있겠더군요. ^^;(여자 훔쳐놓고 ‘형, 나 도와줄거지?’라니…-_-)
트로이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지만, 여기에서 브래드 피트가 보여준 아킬레스 역은 상당히 매력적이었고, 오래된 배우들과 최근 뜨는 배우들을 적절히 섞은 캐스팅도 마음에 들었습니다(숀 빈의 오딧세우스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다음번에는 오딧세이아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한때 유황오리가 될 뻔한 목마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음)

매스컴에서도 공공연연히 ‘여성들을 위한 영화’를 표방하고 있는데, 정말로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 몸매에 한 얼굴들이더군요. 여자 연기자들이 이렇게 볼품없이 죽어보이는 영화도 참으로 드물 것 같습니다(차라리 올랜도 블룸의 여장시키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

영화를 보고 나니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트로이 전쟁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3 responses

  1. 리츠코

    김형진>저도 보면서 어떻게 눈이 저렇게 유리처럼 투명한 파란 색일까 감탄했지요. ^^

    저는 그 첫 장면 보면서 ‘헉, 멋지잖아’ 했는데 역시 남자들은 재미있어 하더군요. -_-;;;(관점의 차이일지도)
    저는 헐크를 안 봐서 에릭 바나의 매력에 푹 절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홋홋홋. 제 주변에서도 새삼 에릭 바나 팬들이 부쩍 늘었더군요.

    목마에서 군대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유황오리 생각을…;;(오리를 벗기면 안에 찹쌀이..)

  2. 김형진

    이런, 프리아모스 왕이 피터 오툴이었군요. 영화를 보면서도 왕의 강한 감정이 느껴지는 투명한 푸른 눈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말씀을 듣고 나니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폐인이 된 채 차에 실려 가던 로렌스의 공허한 푸른 눈이 생각나네요. 참 멋진 배우입니다.

    트랙백에도 있는 “점프 강베기” 가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습니다만(처음 거인과 싸우는 신에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었다가 얼마나 민망했던지 -_-), 뭐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습니다. 사실 원래 신화는 오히려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가 재미있고 전쟁 자체는 별로 드라마가 없는 이야기인지라, 이것 저것 드라마로 엮으려고 애를 많이 쓴 것 같더군요.

    영화를 보면서 웃었던 것 중 또 하나는 에릭 바나를 보면서 “저 인간이 언제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요~ 후회할꺼야~’”라고 소리치다가 초록색 괴물로 변할까? 라는 생각이 시종일관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목마에서 숨은 군대가 나오는 신은 꼭 전위 댄스 공연 같아서 멋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