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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미술관

이 작가를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도서관에 예약도서를 찾으러 갔다가 뭐 더 볼 게 없을까 둘러보다 눈에 띈 책이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였고 내용이 너무 좋았다.
(다 읽고 나면 정말 미술이든 어느 분야든 징글징글하게 여자들은 안 끼워주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브런치에 작가 계정이 있길래 구독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한국일보에 연재중이던 칼럼을 묶어 신간이 나온다고 올라온 글을 보고 바로 주문했다.(‘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도 반납한 후에 결국 사서 이번에는 도서관에 신간신청은 건너뛰어 시간 절약을…)

‘못생김’에 대한 경멸의 대점에는 과도한 미모 찬양이 있다. 좋은 외모는 ‘우월한 유전자’니 ‘착한 몸매’니 하며 지켜세워진다. ‘못생김’은 악하고 열등하다는 뜻인가.

(중략)

그러나 사람들의 정신과 의식은 종종 과거로 회귀하는 듯하다. 외모에 관한 한 여전히 견고한 편견과 차별의 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말이다.

p109

그림이나 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나 유튜브 채널을 좋아하는데, 보통은 작품을 보는 법이나 그 당시의 사회 배경이라든지 화가에 대해 설명하는 방향이 많다면(예를 들어 나카노 쿄코 책은 처음 몇 권은 재미있는데 뒤로갈수록 반복적이고 작가 본인의 감수성(?)에 지나치게 의지해서 결국 손이 안 가게 되더란) 이 작가의 책은 작품이나 화가를 두고 좀더 다각도의 의문을 제시한다.

책의 시작은, 실제로는 2천년 전 중동 지역 유대인의 모습이었을 예수의 모습이 왜 지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하얗고 멋지게 늘어진 곱슬머리의 미남으로 고정되었는가 였고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들이 실제 그리스 조각들에 채색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이상적인 조각은 하얗다’고 믿은 점, 리얼돌이 성행하는 현실에서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얼마나 한층 의미심장해지는지 등등을 엮어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 작가의 여성 화가들을 바라보는 시선인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 좋아하는 그림이니 한번 더 붙여보자 .

왜 여성 예술가는 오롯이 예술가로만 존재하지 못하나? 왜 예술 외적인 성 담론과 연결되어야만 하는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들이 지나치게 성폭력 사건에 초점을 맞춰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해석한 탓도 있지만,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선정적으로 다룬 소설과 연극, 영화 등 대중문화의 역할도 작지 않다. 대중은 예술가로서의 젠틸레스키보다는 성 스캔들의 주인공으로서의 젠틸레스키를 더 주목했던 것이다.

p.249

마담 르브룅은 여성이 미술계에서 성공하기 힘든 시대적 상황에서 순전히 개인적인 재능과 도전적인 태도로 엄청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화가였다. 게다가 조국과 남편을 떠나 12년간 타국을 방랑하며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드문, 혹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강인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모성애를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현대 페미니즘의 패러다임으로 18세기 여성의 삶을 비판할 수 있을까? 마담 르브룅은 치열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며 예술혼을 보여준 위대한 작가였다.

p281

기존의 매체나 책에서 여성조차도 여성 화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녀의 ‘비극적인 배경’에 더 중심을 두거나 과거의 그녀들에게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며 오히려 엄격하게 비판하는 글을 접할 때마다 좀 갑갑했는데 그 점에 대해 명쾌하게 짚고 있다.

미술 평론가 앨리스터 수케는 고갱을 19세기 하비 와인스타인으로 지목한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많은 여성을 성 착취한, 괴물 같은 성욕을 가진 포식자였다. 오늘날의 윤리적 가치로는 아름답고 예술적이지만 성 착취적인 타히티 여성들을 그린 고갱의 초상회에 무조건 탐닉하기 어렵다. 당시 유럽 남성의 원주민 소녀들에 대한 부도덕한 성 착취 범죄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고갱의 작품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p311

그리고 책 후반부의 고갱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남성 화가들의 윤리적인 문제는 ‘시대의 일부’로 퉁치고 한쪽 눈은 감은 채 작품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과학 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많은 질병들이 정복되었지만 신종 바이러스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좋아진다 해도 영원히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숙명 앞에, 인간의 이성은 중세 때나 지금이나 초라하기만 하다. 고야가 주는 메시지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깨어난다.’

p299

마침 요며칠 자가격리 해제 등등의 엔데믹 기사를 보고 마음이 심난해서인지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건 고야가 남겼다는 저 한 마디였다.

이성이 잠들면 악마가 깨어난다.

팬데믹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인간의 밑바닥을 보아왔는지. 그 시간이 거의 지나가고 있다지만 이미 그걸 알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림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살면서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넓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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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ponses

  1. 김조디

    어제 이 포스트를 보고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빌려왔는데 이 책 너무 좋아서 사서 여러 번 계속 읽고 싶어욬ㅋㅋㅋ

    1. 이 책 너무 좋죠. >.< 저도 결국 사서 가끔 꺼내서 읽어요. 혹시 이 책은 읽어보셨나요. 이 책도 저 책이랑 좀 비슷한 주제인데 재미있어요!

      저 책 다 읽고 나면 ‘진짜 여자는 드럽게 안 끼워준다’ 싶지 않나요. -_-+

      1. 김조디

        딸 착취하다가 죽을 때는 공방 아들 물려주는 부분이 가장 빡침포인트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 요것도 찜해놔야겠네요 책 추천 감사해요 ㅋㅋㅋㅋ

        1. 저는 지가 써먹어야 해서 딸이 왕실 화가로 들어갈 수 있었던 앞길 막은 이야기가 제일 빡쳤어요.ㅋㅋ 

          1. 김조디

            그 애비가 그 애비였죠? ㅋㅋㅋㅋㅋ 너무 짜증ㅋㅋㅋㅋ

            1. 그러고보니 같은 애비였던 듯요. ㅋㅋ 근데 거기 나오는 애비는 다 비슷했어요. ㅋㅋㅋㅋ

            2. 김조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맞아욬ㅋ 앙귀솔라 아버지만 좀 괜찮았던 것 같아욬ㅋㅋㅋ